[랩진] 아는 사이

text 2016. 12. 11. 03:58

 


내가 김석진에 관해 아는 사실이라곤 우리가 고등학교 3년 동안 같은 반이었다는 것과, 눈이 아주 나빠서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다녔다는 것, 그리고 졸업 무렵에 퍼졌던 이상한 소문 탓에 꽤 심한 따돌림을 당했다는 것 정도였다. 그 외에는 김석진에 관한...그 몇몇의 자질구레한 기억들이 전부였다. 어쩌다 시선만 마주쳐도 곧잘 빨개지던 피부나 억울하게 쳐진 눈꼬리 같은 거. 멀쩡한 허우대 치고 운동을 잘 못 했던 것 같고, 미대에 진학한다고 했다가 언제였나 손을 다쳐 그냥 인문 대학에 간다고 했다.


아, 그리고 차가운 음료는 잘 못 마신다고 했던 것 같은데,


“안녕하세요, 헉, 아이스, 아메리카노... 하흐, 한,잔, 주세요...”


12월이 되도록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찾는 걸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.



아는 사이



김석진은 매일 오후 1시에 찾아왔다. 뭐 그리 급한 일이 있는지 헉헉대며 뛰어 들어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시키고는, 음료가 나올 때까지 내도록 이 쪽만 째려보다 다시 뛰쳐 나가는 괴짜 짓을 반복한 게 벌써 3주 째였다. 처음엔 저 치가 김석진인지도 몰랐다. 앞서 말 했듯, 내가 기억하는 김석진의 외양이란 도수 높은 두꺼운 안경이 거의 전부였으니까. 졸업한지도 5년이나 지났겠다, 가뜩이나 흐릿하게 남아 있던 얼굴이 범생이 안경이란 아이덴티티마저 벗고 나타나니 첫 눈에 알아볼 수 있을 리 만무했다. 김석진도 피차 마찬가지인지, 특별히 나를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. 그저 매일같이 카페에 들러 한 겨울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뛰어갈 따름이었다.


내가 김석진을 기억해 낸 건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. 연말이랍시고 오랜만에 모인 동창들과의 대화 속에서 느닷 없는 이름이 튀어나온 탓이었다.


너 김석진 기억나냐.


김석진? 몇 번 안 불러 본 것 치곤 꽤 익숙하게 입 안에서 굴러가는 이름이었다.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 꽤 유명인사였는지 동창들이 하나둘씩 말을 보태기 시작했다. 아, 그 호모라고 왕따 당한 새끼. 입시 직전에 두드려 맞아서 손 작살난 새끼. 그래도 그 새끼 금수저였잖아. 졸업하고 아버지 사업도 망했대. 아 그랬냐. 하여간에 불쌍한 새끼. 그렇게 느닷 없이 김석진을 안주 삼아 술잔을 돌리고, 그 사이에서 나만 할 말이 없어 안주만 뒤적였었다. 그 날 술자리는 자정이 넘어서야 끝났다. 처음 김석진의 이름을 꺼낸 동창과 같이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던 참이었다. 그 때 걔가 나에게 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. 별 말은 아니었는데, 그게 또 별 말이었다.


야, 김석진 걔 너네 카페 근처에서 일 하더라. 나 그저께 과외생 문제집 산다고 사거리에 서점 갔는데 걔가 있더라고. 계산대에서 눈 딱 마주쳤는데 웬일로 아는 체 하더라. 난 당연히 못 알아 보는 척 할 줄 알았거든. 근데 그나마도 어이 없는 게, 걔가 나 보자마자 딱 그러는거야. 너 남준이 친구 맞지? 얼떨결에 고개 끄덕이긴 했는데 나는 솔직히 어이가 없었지. 나는 그 새끼랑 짝도 했었는데, 무슨 남준이 친구... 그래서 난 너랑 걔가 이제까지 연락하고 사는 줄 알았어, 둘이 친했었나 하고. 너 여기 카페에서 일 한다니까 그건 또 모르는 눈치였어. 얼굴 곱상한 건 여전하더라. 그 멍청해 보이는 잠자리 안경도 똑 같고.


그 날 집에 가서 졸업 앨범을 뒤져 봤다. 김석진의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아서였다. 걘 날 기억 한다는데, 난 기억을 못 하니까, 괜히 좀 미안했다. 촌스럽게 웃고 있는 내 사진 옆에 제 얼굴의 절반만한 안경을 쓴 김석진의 사진이 보였다. 나름 가린다고 가렸을텐데, 직전에 얻어 맞은 멍자국이 채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. 김남준. 김석진. 멀지 않은 이름이라 3년 내내 출석 번호도 연달아 있었지. 덕분에 졸업 축하 메시지를 김석진에게 썼던 게 떠올랐다. 내 다음 번호가 김석진이었던 탓이었다. 그 때 내가 뭐라고 했더라.


[석진아 너는 안경 벗으면 더 예쁠 것 같아]


곧바로 다음 페이지에 등장한 롤링 페이퍼에 얼굴이 달아 올랐다.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. 입 밖으로 윽 소리를 내며 졸업 앨범을 덮었다. 미친 김남준, 허세도 이런 허세가 없었네. 5년 전에 지껄인 주책스런 문장에 얼굴이 뜨끈해졌다. 그 날은 새벽이 깊도록 잠이 안 왔다. 주량이 너무 세서 그렇다고 생각했지만, 밤 새도록 빈 천장에 자꾸 김석진의 얼굴이 어른거렸던 걸 보아 취하기는 단단히 취했던 모양이었다.


그 다음 날부터, 나는 매일 오후 1시에 카페를 찾는 남자가 김석진이란 걸 알아 볼 수 있었다. 그 어마무지한 안경을 벗었고, 젖살이 살짝 빠졌고, 키가 전보다 훌쩍 컸지만 그 남자가 김석진임은 확실했다. 처음엔 내가 지난 밤 너무 김석진 생각을 하다 잠 들어서 얼굴이 겹쳐 보이나 싶었다. 아니면 엄청나게 닮은 사람을 착각했다던가.


“아흐...아메리카노...차가운 거, 흐, 하나 주세요...”


그 때 김석진은 베이비 핑크색 후드를 입고 있었다. 성인 남자가 즐겨 입기엔 좀 부담스러운 색이지 싶었다. 저 사람은 이 날씨에 점퍼도 안 입고 무슨 운동하는 사람인가 봐. 옆에서 누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카운터 쪽을 내다 보니, 아니나다를까 이 쪽을 가만 쏘아 보고 있었다. 김석진은 저런 얼굴 한 적 없는 것 같은데, 뭐가 저렇게 불만이래. 아메리카노에 얼음을 타며 생각하다, 후드 티 가슴팍에 프린팅 된 문구를 보게 된 것이다.


“이화 문고.”

“네?”


화들짝 놀라며 동그랗게 뜨는 눈매를 보아하니 분명 김석진이 맞았다. 김석진은 늘 동그랬다. 안경도, 눈매도, 코 끝도, 입술도 늘 동글동글해서, 가끔은 귀엽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고.


“손님 후드에 써 있길래요.”

“아...제가 서점에서 일 하고 있어서요.”

“사거리에 있는 서점, 맞죠?”

“맞아요. 아시는구나...”


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내리까는 버릇도 여전했다. 시선을 피하고서 이 쪽을 힐끗 훔쳐 보는 것도, 그렇게 해서 다시 눈이 마주치면 슬쩍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도. 모든 게 김석진이었다.


“이 시간엔 영업 안 해요?”

“아뇨, 하는데...잠깐 나온거에요.”

“다른 직원들이 가게 봐 주나봐요.”

“아니에요, 혼자에요.”


그럼 가게는요? 마저 대화를 이어가려다 말았다. 김석진이 조급한 눈으로 내 손에 들린 아메리카노를 바라 본 탓이었다. 아, 죄송. 어색하게 웃으며 컵을 카운터에 내려 놓기 무섭게 김석진이 아메리카노를 채어 들며 말 했다.


“그래서 맨날 뛰어 오잖아요, 시간이 없어서.”


그러고 민망하다는 듯 웃더니 익숙하게 카페 문을 열고 나가 버리는 것이었다. 그 순간 나는 살짝 멍 해졌다. 뛰어가는 김석진을 쫓아 나도 모르게 가게 앞까지 나갔었던 것도 같았다. 김석진은 벌써 교차로 건너편으로 멀어지고 있었다. 달리기도 엄청 빨라진 모양이었다. 옛날에는 운동도 못 했는데.


[너 김석진 기억나냐.]


문제는 그 다음이었다. 하루 종일 머릿 속에서 김석진이 떠나지 않은 탓이었다. 김석진이 왜 시간에 쫓기며 매일 카페로 찾아 오는지에 대해. 김석진이 차가운 음료를 못 마신다는 내 기억 속 정보가 정말 잘 못된 것인지에 대해. 내가 김석진을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, 김석진도 그냥 나를 알아보지 못 하는 것인지에 대해.


[김석진 걔 너네 카페 근처에서 일 하더라.]


나는 왜 자꾸 김석진을 생각하는가. 관심도 없고 알아 보지도 못 했던 5년 전 동창. 호모라고 소문나서 1년 간 따돌림만 당하던 걔. 저는 차가운 물을 못 마신다면서 체육 시간이 끝날 때마다 나에게 찬 물병을 내밀던 김석진.


[걔가 나 보자마자 딱 그러는거야. 너 남준이 친구 맞지?]


때때로 김석진의 조는 얼굴을 훔쳐 봤던 기억이 있다. 그건 순전한 궁금증 때문이었다. 어째서, 김석진과 나는 자꾸만 눈이 마주치는가에 대한 의문. 3년 간 우리는 수 많은 찰나에 눈이 마주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석진의 얼굴이 흐릿하도록 오랜 시간 응시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. 그저 두터운 렌즈 너머에 동그랗게 뜬 김석진의 눈매만 어렴풋 되새길 따름이었다.


[그래서 난 너랑 걔가 이제까지 연락하고 사는 줄 알았어, 둘이 친했었나 하고.]


롤링페이퍼를 쓴 다음 날이었다. 김석진은 안경을 벗고 학교에 왔었다고 했다. 정작 안경을 벗은 김석진을 본 애들은 몇 없었다. 등교하자마자 김석진을 괴롭히던 녀석들과 시비가 붙었다고 했다. 김석진이 복도에서 발을 밟고 지나갔다는 얘기도 있었고, 먼저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갔다는 얘기도 있었다. 나는 김석진이 눈이 몹시 나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네들이 김석진의 사정을 이해해 줄 리 만무했다. 그 날 김석진은 오른 손이 박살났다.


[얼굴 곱상한 건 여전하더라. 그 멍청해 보이는 잠자리 안경도 똑 같고.]


나는 김석진의 맨 얼굴을 본 적이 없다. 김석진은 또렷한 눈으로 나를 바라봐 준 적이 없다. 말 하자면 이건 변명이었다. 카페에 매일 나타나던 김석진을 알아보지 못 한 것에 대한 구차한 변명. 그러한 동시에 새롭게 피어나는 의구심이었다. 


“어서오세요. 이화문,”


어째서 김남준은 김석진의 서점으로 찾아 갔는가?


“...고 입니다.”


어째서 김석진은 또 다시 두꺼운 안경을 걸치고 있는가?



*



어린 김석진의 추억이라곤 김남준과 고등학교 3년 동안 같은 반이었다는 것과, 눈이 아주 나빠서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다녔다는 것, 그리고 졸업 무렵에 퍼졌던 이상한 소문 탓에 꽤 심한 따돌림을 당했다는 것이 전부였다. 그 외에는 김남준에 관한...그 몇몇의 얼마 없는 기억들 뿐이였다. 어쩌다 시선이 마주치면 씩 웃어주던 입매나 으쓱 올라가던 눈썹 같은 거. 3년 간 같은 반이었던 것 치고 친해지지 못했고, 꽤 오랜 날을 김남준의 뒤통수만 훔쳐 보며 보냈었다.


그래도 졸업 후 시간이 흘러서는 기억 너머로 잊었던 것 같은데,


“안녕하세요, 헉, 아이스, 아메리카노... 하흐, 한,잔, 주세요...”


또 다시 김남준의 뒤만 쫓는 걸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.


때때로, 아니면 꽤 자주, 김석진은 김남준에게 말 하고 싶었다. 너 나 기억 못 하지? 난 너 아는데. 그렇다고 김남준에 대해서 정말 잘 아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. 둘은 친구도 뭣도 아닌 사이였다. 좋게 봐 줘서 동창이라 해도 길 거리에서 마주치면 알아보지 못할 게 뻔했다. 3주를 꼬박 카페로 찾아갔음에도 아는 티 하나 없는 김남준이 그러했다.


김석진은 점심 시간이 되기 무섭게 서점의 문을 잠궜다. 점심 시간은 20분이었다. 사거리의 신호 때문에 카페에 다녀오기엔 늘 빠듯한 시간이었다.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다.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. 김석진은 촌스러운 사람이라, 유창하게 주문할 수 있는 메뉴라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뿐이었다.


그런 김석진이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라곤, 5년 전 김남준이 남긴 롤링페이퍼 한 줄이었다. 석진아 너는 안경 벗으면 더 예쁠 것 같아. 그 한 마디에 김석진의 삶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부서져야 했나.


언젠가 김남준이 성이 난 투로 김석진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. 너는 왜 그런 병신 같은 소문에 부정도 못 하냐. 김석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 했다. 병신 같은 소문이 진짜인 걸 뭐. 속으로 웅얼대며 왜 김남준이 자신에게 화를 내는지에 대해 이해하려고 애쓸 따름이었다. 그러나 5년이 지나도록 김석진은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 했다. 김남준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다. 그래서 너절한 한 줄짜리 롤링페이퍼만 붙잡은 채 잘 보이지 않는 눈을 찌푸리고 김남준의 앞에 오도카니 서 있다 오는 것이었다.


나는 어떻게 해야 좋은 사람처럼 보일지 몰라. 멋도 낼 줄 모르고. 커피 메뉴도 잘 몰라. 네가 한 말이 생각나서 안경도 벗고 왔어. 그래도 너 나 기억 못 하지? 난 너 아는데. 뱉을 수 없는 그 말들만 곱 씹으면서.


“어서오세요, 이화문...고입니다.”


그리하여, 김석진이 김남준의 온전한 얼굴을 본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. 서점 문의 낡은 벨을 울리며 김남준이 들어 선 지금 이 순간. 김석진은 이 모든 것이 꿈인가 싶었다. 일어난 것도, 앉은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김남준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.


“야, 김석진.”


이상한 일이었다. 김남준의 목소리에 깨끗하던 시야가 다시 부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. 성큼성큼 김남준은 가까워져 오는데, 어째서인지 안경이라도 벗은 것처럼 눈 앞은 점점 더 흐렸다. 우릿하게 달아오른 눈을 두어번 깜빡이는 동안 김남준은 벌써 카운터 앞에 다가 와 있었다.


“너 나 기억 못 하지?”


그리고 그가 불퉁한 어조로 김석진에게 말을 건 순간,


“나는 너 아는데.”


김석진은 끝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.




Fin.아는 사이





*천자 내외로 전력에 참여하려던 글인데 어마무지하게 지각해서 마무리가 흐지부지...ㅠ 나중에 좀 더 다듬어야겠다..

*[나는 어떻게 해야 좋은 사람처럼 보일지 몰라. 멋도 낼 줄 모르고.] 울면서 이 말을 하는 석진이가 보고 싶었을 뿐인지라 기본 뼈대가 부실했던 것도 사실

*석진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먹는 이유는 1.정말로 메뉴는 아메리카노 밖에 몰라서 2.첫 날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들고 뛰었다가 데인 적이 있어서